김훈(전 농구선수감독)=나이, 학력, 가족, 아마추어 시절 실업, 프로선수 시절 은퇴한 뒤 근황, 일찌감치 은퇴한 이유=김훈의 농구교실 해설위원, 프로코치 제안을 거절한 이유.
- 김훈(전 농구선수, 감독) 프로필 나이 고향 키 몸무게 가족 학력 소속사
- 김훈은 1973년 5월 6일생으로 49세 입니다.
김훈의 고향은 대전광역시 중구라고 합니다.
김훈의 키는 190cm, 몸무게로는 88kg이랍니다.
김훈의 학력은 서대전초등학교, 대전중학교, 대전고등학교,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학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훈의 가족으로는 아내 김혜림(1971년생), 딸 문진원(1999년생)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훈 종교는 불교입니다.
김훈 프로 입단은 1996년 대우증권 농구단 입단으로 데뷔했어요.
김훈의 언니 김영은 여자배구 SK케미칼의 간판선수로 유명했어요. 40대 후반이지만 아직 젊었을 때 얼굴과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고 머리도 풍성합니다.
●김훈(전 농구선수감독)아마추어 시절
김훈은 대전 고등학교를 나와 연세 대학교에 진학했어요. 키가 크다며 농구를 시작할 때 농구를 안 하려고 했는데 키가 갑자기 15cm나 커져서 갑자기 장신 슈터가 되어버려 연세대 덕분에 연세대에 스카우트 되었습니다.
다만 스카우트 과정에서 원래 홍익대 진학을 결심했으나 번복하는 바람에 홍익대와 관련된 농구부 코치에게 죽도록 얻어맞았고 최희암 감독이 지시했다는 각서를 쓰고 농구를 그만둘 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연세대 입학시절에는 9-2학번 동기 우지원 석주일보다 적었지만 서장훈의 입학으로 연세대가 1가드-3포워드-1센터 시스템으로 바뀌면서 우지원, 3주보다 뛰어나던 외곽 수비력과 볼핸들링, 개선된 3점슛 능력 덕분에 3주를 제치고 주전으로 발탁돼 농구대회에서 맹활약하게 됐습니다.
특히 1993-94 농구대잔치에서 연세대가 20승 1패를 기록하며 우승할 때 주역 중 한 명이 돼 이름을 알리게 됐습니다.
슈팅보다는 수비력에서 처음 이름을 날렸고 문경은이 졸업한 뒤 주포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김훈의 실업 프로선수 시절
이때 활약으로 신생 대우증권 농구단에 우지원과 함께 영입됐고 프로 출범 후 인천 대우제우스의 주포로 맹활약했습니다 첫 세 시즌 평균 득점 기록은 15.7, 16.3, 14.6점입니다.
팀의 주포로 활약하는 모습에 잘생겼고, 웃는 얼굴로 “스마일 슈터”라는 별명을 얻으며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원년 시즌에는 우지원이라는 초절정의 인기스타가 팬들을 대부분 잠식했지만 우지원이 사회복무요원으로 입대한 기간에는 그의 인기도가 팀의 원 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농구 외부 과실로 인해 농구 인생에 발목을 잡혔고 병역비리였어요. 그의 아버지와 구단 직원이 병역 면제를 위해 박노항 원사에게 청탁을 했는데 본인은 병역 비리를 시도하지 않았는데 그냥 주변에서 은밀하게 공작을 했다고 한다.
다만 자신이 완전히 몰랐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이 때문에 1999-2000시즌 도중 그의 병역면제는 취소됐고 재검 끝에 4급 판정을 받아 시즌 도중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면서 그의 기량은 모두 사라졌다.
처음부터 허리가 나빴다고는 말하고 있었습니다만, 계속 달리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바로 직전 시즌 모범선수상을 받은 상황이라 묘하게 흑역사가 됐어요.
공익근무 도중 소속팀 대우는 신세기통신에 매각되고 신임 수뇌부는 그를 홍사붕과 맞바꾸게 되었습니다 SBS로 이적해 뛴 첫 시즌인 2001-02시즌에 평균 11.5점을 기록하며 재기에 성공했나 싶었지만 계속 부진에 빠져 후보로 밀려났습니다.
원 소속팀 인천 전자랜드가 그를 FA로 다시 영입했지만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해 창원 LG로 2:2 트레이드(김훈 김동언↔정진영 김재훈)됐고 LG에서는 완전히 백업으로 전락해 뛴 뒤 다시 안양 KT&G로 한정원과 맞바꿨습니다.
그리고 발목 부상으로 팀에서 은퇴했습니다.
김훈(전 농구선수감독) 왜 일찍 은퇴했나.
김훈은 2003-2004시즌부터 출전시간이 절반으로 줄었고 기록도 저절로 떨어졌어요.
김훈: 자유계약선수(FA) 계약 전 발목과 어깨를 다쳤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했지만 FA 첫해에는 병으로 쉴 수 없어 통증 주사를 맞으며 뛰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잘못 생각했어. 1년마다 감독이 바뀌면서 수술은 미뤄졌다.
이때 받아야 했던 수술이 오세근(안양 KGC인삼공사) 선수가 받은 인대 재건 수술이다.
회복하는 데 최소 9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고 더 이상 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수술을 하고 1년 정도 재활을 한 뒤 뛰었다면 좋은 플레이를 했을 텐데. 지금도 코트에서 뛰는 꿈을 꾸기도 한다.
그렇게 그는 끝내 부상을 극복하지 못했고 시간이 흘러 결국 20062007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김훈의 제 나이 34세에 결정된 이른 은퇴였어요.
●김훈의 은퇴 후 근황 … 김훈의 농구교실 해설위원코치 제안 거부, 향후 목표
친정 LG 유소년 농구총감독을 거쳐 2009년부터 수원에서 농구교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동네 예체능과 뭉쳐야 쏜다 – 전설들의 농구대잔치에 출연하셨습니다
그만두려던 참에 창원 LG로부터 유소년 농구클럽 총감독 제의를 받고 맡게 됐다.
불쑥 맡은 유소년 농구클럽의 총감독이라 유소년을 가르치는 것을 처음부터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몇 달 동안 가르치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한 강사가 아파 어쩔 수 없이 수업에 참여하게 됐다.
그때 레이업슛을 못하던 한 학생이 10분 만에 바로 해냈다.
아이들의 실력이 향상되는 걸 보니 보람과 쾌감이 솟았다.
그러면서 유소년 농구 지도를 시작했다.
김훈: 유소년을 가르치겠다는 마음을 굳힌 뒤 한 방송사 해설위원의 제안도 거절했다.
방송사 관계자들은 모두 창원에 와 있었다.
가르치는 일에 재미를 붙이다 보니 갓 맡은 아이들을 두고 떠나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수원시의 제안에 따라 2009년 김훈의 농구교실을 시작했다.
김훈: 200명 정도였던 아이들이 신종 플루 때문에 6070명 정도로 줄었다.
그때 프로구단의 코치 제안이 있었다.
사실 그때 프로에 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농구교실을 시작한 지 1년도 안 돼 아이들을 배신하고 갈 수는 없었다.
내게는 약속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코치의 제안이 없다.
프로코치 제의가 들어오면 정말 고민 많이 할 것 같아. 하지만 70%는 프로에 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만약 간다고 해도, 1~2년 정도 「프로가 이렇구나」라고 느끼기 위해서 짧게는 할 수 있지만, 길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농구교실을 운영한 지 올해로 12년째다.
유소년 농구의 매력은 꼭 승리하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에게 주입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씨앗에 물을 주는 역할이다.
아이들에게 넣지 마라 골이 들어갔을 때의 기쁨을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농구라는 종목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점이 좋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목표와 꿈은 우리 농구 교실에서 많은 프로 선수를 배출했으면 하는 것이 목표이고 꿈은 지금 체육관도 좋지만 나만의 체육관을 지어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와서 마음껏 농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사실 은퇴하고 여행가가 되고 싶었어. LG유소년 총감독 시절 그 학생이 레이업슛을 성공시키지 않았다면 지금 세계를 여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농구와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