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선술집 찾기(전편)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5 04:12:05
추억의 선술집 찾기 |
김요한 기자 [email protected] |
어린 시절. “어디서 또 그렇게 마셨어?” 술취한 아빠의 엄마가 묻는다.
“신포동.” 아버지의 대답이 당연해 보이던 1980년대 인천시 중구 신포동에는 약주를 사랑하는 문인과 화가, 장사꾼과 노무자, 그리고 합동 넥타이단까지 있었다. 당시 가장 번창했을 신포동 주막을 찾은 시민들은 바쁜 나날과 삶의 회한, 희로애락 등을 약주에 어우러져 기록했다. 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수용하는 선술집은 신포동의 특징으로, 주인장은 술 미안한 듯 그 돈으로 차라리 소주 한 잔 하고 싶다며 뜨거운 감자탕 한 그릇을 무료로 줬다. 옛 주인이 누군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건어물 접시 위에 약주 한 병을 올려 놓았던 집. 무너지기 직전의 신포동은 아직도 옛 기억이 한 조각 남아 있는 허름한 선술집이다. ■신포주 신포시장 한가운데 두 개의 큰 골목을 잇는 작은 통로에 위치한 신포주점은 작고 어설픈 문 뒤에 4~5개의 테이블이 있는 작은 주점이다. 한때 작가, 화가 등 예술가들이 ‘만낭집’, ‘미미집’과 함께 삶과 예술을 이야기하던 집은 그때나 지금이나 허름한 술집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피티와 그래피티로 얼룩진 벽, 아무렇게나 놓인 술잔과 과자, 이유 없이 안주인에게 장난을 치는 주정뱅이의 높은 목소리가 다정하다. 지금은 문을 닫은 신포주점을 비롯해 ‘백한가리’와 ‘만양집’의 문턱에 최병구(崔炳九) 시인의 뼛가루를 뿌렸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우리는 몇 백 원의 약주를 놓고 밤새도록 문학과 예술과 삶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젊고 날렵해 보이는 웨이터도 없고, 퓨전이라는 이름에 섞인 화려한 안주도 없지만, 서민들을 위한 술집은 이래야 한다는 걸 보여주듯, 신포바의 문턱은 여전히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차츰 닳아간다. ■염염집, 만양집 당시 도수 30도가 넘는 소주에 안주를 곁들이던 이 선술집들은 과거의 맛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제쳐두고, 이미 이름만으로도 감사하다. 이 집들이 언제 지어졌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다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인과 손님 사이의 교감인데, 주인에게 “다 내놓으라”고 하면 약주와 생선회를 곁들인 매운탕 한 그릇을 내어준다. 인천 술꾼들은 술의 맛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매운 박대와 매운 찌개. 그리고 소주 한잔. 약간은 무뚝뚝한 미소 속에 주인이 웃는 것만큼이나 초라해 보이지만, 고향처럼 포근한 맛집을 찾고 있다면 지금 신포시장 입구로 들어갈 수 있다. 지금은 사라진 신포동의 집들 1985년 인천시청이 중구에서 남동구로 이전하면서 시작되었을까. 아니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인천 중구 인현동 주점 화재참사가 시발점이 된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동인천 일대와 신포동, 신포시장 일대는 과거의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김윤식(인천작가협회 회장)은 인천에서 가장 초라한 선술집이었지만 인천 문화의 가장 우아한 나날을 즐겼던 ‘백한가리집’의 퇴장이 신포동 시인의 몰락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해장국으로 유명한 맛집 ‘답동관’도 사라졌고, 가벼운 가방을 든 사람들이 총총한 잔을 마시러 가는 ‘충남집’과 ‘미미집’도 사라졌다. 화가들의 미술전과 시전의 상설 전시장이었던 설렁탕의 금화식당과 은성카페도 잇달아 문을 닫았다. 아쉽게도 과거 신포동을 사랑했던 선술집 손님은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피리 부는 노인, 신포시장을 거닐던 故 최병구 시인, 시장 입구에서 조개껍질을 던지는 여인들에게 장난을 치는 것을 좋아했던 故 최병구, 화가 김영일. 너무 일찍 죽었고 아름다운 은발을 가졌습니다. 오늘은 낡은 작은 의자에 앉아 스테인리스 테이블 위의 잔을 들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술 한잔 합시다. 주인은 주문하지 않은 간식을 가져와서 내려놓고 “저거 먹어. 오늘은 이게 제일 맛있다”는 선술집 특유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